“Remember Pearl Harbor, Remember December 7th!”
- 진주만 공습 다음날, 미국 신문 1면 기사
“여명의 수평선에 승리를 새기세요!( 暁の水平線に勝利を刻むのです!)”
- 일본 DMM사에 의해 서비스되고있는 게임 ‘칸타이코레쿠숀’의 오프닝 멘트
“역사를 잊은 국가에게 미래는 없다.”
- 윈스턴 처칠
서 두
“미드웨이의 원수를 갚는 거에요!”
- 웹게임 ‘칸타이코레쿠숀’에 등장하는 ‘칸무스’ 경항모 ‘히요’의 대사.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미 서두만 보고서도 오늘 제가 말하려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알아차리셨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일본에서 성황리에 서비스되고 있는 온라인 웹게임, 한국명 ‘함대 콜렉션’, 일본명 ‘칸타이코레쿠숀’, 줄여서 ‘칸코레’라 불리는 게임입니다. 물론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 몇몇 분들, 아니 많은 분들이 ‘칸코레가 뭐야?’라며 궁금해 하실 테니, 본격적인 글에 앞서 간단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칸코레’는 일본에서 인기리에 서비스되고 있는 웹게임으로써, 다른 소셜 기반 웹게임, 모바일 게임들을 제치고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애니메이션, 캐릭터 산업 등으로 그 범위를 확대해나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2013년 10월 10일부로 게임 이용자 수가 백만 명을 돌파하고 있는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진수부’의 ‘제독’이 되어 바다 위를 떠다니며 싸우는 함선 소녀들인 ‘칸무스(함선 소녀의 일본어 약칭)’를 이끌어 ‘세카이(세계)를 위협하는 바다 위의 침략자’들을 쳐부수고 해역을 탈환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가는 최일선에 서게 됩니다.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원화와 여러 작가들이 만들어낸 각 ‘칸무스’들의 독특한 캐릭터성의 매력을 무기로 하여, 일본 내 서비스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타고 서양권의 한국의 일본문화 애호가들 사이에 입소문이 퍼져, 그 인기는 더욱 확대되어가고 있지요.
근데 이 게임이랑 서두에 써놓은 문구들이랑 무슨 상관이냐고요? 아, 제가 몇 가지 설명을 빼먹었네요. 보충 좀 하겠습니다. ‘제독’이 이끄는 ‘칸무스’들은 태평양 전쟁 당시 대일본제국의 침략 선봉에 선 연합함대의 함선들의 이름과 그 특징을 그대로 따온 ‘여리고 착한 소녀’들이며, 대일본제국 해군이 쓰던 함포와 함재기들을 그대로 장착한 이 ‘칸무스’들이 맞서 싸우는 ‘세카이의 침략자’들인 ‘심해서함’은 ‘파운드-야드 법’을 따르는 주포와 어뢰를 장비한 기괴한 형상의 ‘함선 괴물’들입니다.
게임의 이벤트로 특별히 개방된 전장 중에는 과달카날 전투 중 일어난 해전을 모티브로 한 ‘아이언 바텀 사운드’ 해역이 있으며 해당 해역의 보스로는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제국군의 목표였던 헨더슨 비행장을 ‘모에화’한 비행장희가 등장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게임 제작진은 트위터를 통해 2014년에 진행될 이벤트로 ‘미도우에 해역’을 공공연히 예고하고 있지요. 아참, 게임 밸런스란 이름 하에 실제 역사에선 제대로 된 성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삼식탄 등의 일본함선의 무기체계가 강력하게 등장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요.
네, 그렇습니다. 사실상 이 게임은 태평양 전쟁 전체를 상업적인 소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끔찍하고 잔혹한 수많은 전쟁범죄와,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겠다는 야욕으로 점철된 군국주의 침략전쟁인 태평양 전쟁은 세계 평화를 지켜내기 위한 아름다운 소녀들의 싸움이 되며, 일본제국의 침략을 막아냈던 연합군의 함대는 순식간에 ‘세계를 위협하는 괴물들’인 심해서함으로 탈바꿈합니다. ‘연합함대’ 함선의 이름은 쇳덩이와 기름으로 이루어진 전쟁병기가 아닌 예쁘장하고 개성있는 소녀들의 이름이 되며, 끔찍했던 전쟁행위와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무수한 인명사고들은 ‘칸무스’들의 농담 따먹기 소재가 되거나 웃음 유발, 혹은 성적 매력 유발을 위한 세일즈 포인트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업화 과정에서 소비자, 즉 일본인들이 보기 불편해하는 역사적 사실들과 사건들은 철저히 가려지고 외면 받습니다. 가령 진주만 공습은 일본이 먼저 시작했다던지, 결국 전쟁의 결말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발의 핵이었다는 그런 사실들 말입니다.
태평양 전쟁의 결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번 그쪽으로 말머리를 돌려보죠. ‘칸코레’에서, 제독이 이끄는 ‘칸무스’들-사실상 대일본제국의 해군-은 결과적으로, 세계를 위협하는 ‘심해서함’들과 맞서 싸워서 승리하고, 또 승리합니다. 당연한 일이죠. 온라인 게임의 플레이어들이 언제는 패배한 적이 있었던가요? 계속되는 승리 속에서, 소녀의 모습을 지닌 대일본제국 연합함대는 세계 평화를 수호해나갈 것이며, 진수부의 ‘제독’은 착하고 아름다운 정의감 넘치는 매력적인 ‘칸무스’들과 하루 하루를 보낼 테지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은 떨어지지 않을 거고요.
물론 이런 사실을 언급하는 사람들에 대해 제작진은 이렇게 말합니다. ‘칸무스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이 지구와는 다른 곳이다’라고. 아 뭐, 당연히 그러시겠죠. 근데 그럼 왜 당신네들이 발간하는 공식 코믹 4컷에선 칸무스들이 실제 일어난 전쟁사의 사고를 언급하며 난리북새통을 피우고 있을까요? 가상의 영역이며 창작의 영역이니 상관하지 말라라는 논리는 신물 나게 들어왔습니다. 허나 분명한 건 이 게임의 등장하는 주역들인 ‘칸무스’는 대일본제국 해군을 소녀의 모습으로 미화한 것이며, 게임 내에서의 전투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어났던 무수한 해전들을 그 모티브로 따왔다는 것입니다.
<칸코레 공식 4컷 만화는 군사사의 각종 사고를 한낱 웃음거리로 치부함과 동시에, 그 유래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는 걸 잊지 않습니다.>
그냥 전쟁도 아닌, 일본의 침략 야욕과 군국주의 광기의 발현의 총합이었던 태평양 전쟁을, 선악을 뒤바꿔서 묘사하고, 한낱 웃음거리와 성적 세일즈 포인트로 바꿔놓은 몰지각한 상업정신의 산물이 바로 이 ‘칸코레’인 것입니다.
자, 이 글을 보면서 부들부들 떨고 있을 몇몇 ‘프로매국노’분들의 모습이 아주 손에 잡힐 마냥 선하니 이쯤 돼서 글의 방향을 바꿔보죠. 어떤 방향으로? 물론 더 피를 꺼꾸로 솟게 하는 방향으로 말입니다. 문제점은 이미 지적하지 않았냐고요? 아뇨,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본 론
겪어보지 못한 자에게 전쟁이란 달콤한 것이다.
-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우신예찬의 저자.
우선, 전쟁을 다루는 태도의 문제. ‘칸코레’는 ‘전쟁에 대한 어떠한 풍자나 비판적 의식을 지니지 않은 채, 실제 일어난 사건을 순전히 농담 따먹기 식으로만 다루고 있’습니다. ‘칸코레’의 모든 전투 행위는 ‘태평양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지키기 위한(ㅋ) 전쟁’이며 실제로 싸운다는 것에 대해 어떠한 비판이나 고민도 다루어지지 않지요. 까놓고 말해 이러한 흐름은 일본의 애니메이션 등 여러 문화에서 짙게 나타나는 일관적인 흐름이긴 합니다만.
물론, 지금 제가 말씀 드리고 있는 이 비판은 게임뿐만 아니라 게임 제작사에 의해 생산되고 있는 여러 미디어믹스 전반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 물론 농담 따먹기 식으로 다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경우엔 새로운 이벤트 해역 컨텐츠로 업데이트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리고 미디어믹스 에서는 그러한 ‘컨텐츠’가 다시 농담 따먹기와 개그의 소재로 이용되고요. . 물론, 이 주제를 논하자면 수 많은 전쟁 묘사 매체-제2차세계대전 만화부터 콜 오브 듀티 시리즈까지-들에 대해서도 논해야 할겁니다. 더 넓게 잡으면, 게임 내에서 묘사되는 각종 살인 행위들에 대해서도 논할 필요가 있겠죠. 그러나, 일본 매체-칸코레-들의 이러한 ‘전쟁을 가볍게 여기는’ 묘사는 그 중에서도 유별납니다. 뭐, 그것 자체로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다만,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문제는 그렇게 소재로 써먹고 있는 소재가 다른 것도 아니고 태평양 전쟁이라는 겁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이 끔찍한 전쟁은 수 많은 국가들을 도탄에 빠지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일본이 전범국가로써 자위의 목적으로만 제한적인 무장만을 허락 받도록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좀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태평양 전쟁은 일본의 전쟁범죄이며, ‘칸코레’는 바로 자국의 전쟁범죄를 팔아먹는 상품이라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비유해서 연쇄살인마가 자신의 경험을 ‘회고록’도 아니고 ‘미소녀들이 뛰어노는’ ‘라이트 노벨’로 내놓은 것과 같습니다. 아, 물론 이 ‘라이트 노벨’속에서 연쇄살인마는 정의의 히어로로 나오고 경찰은 악의 제국의 하수인으로 나오는 것도 빠트려선 안되겠죠. 아, 차이가 있다고요? 니-예 니-예. 그럼 차이를 반영해서 경찰이 악의 제국의 하수인으로 나오는게 아니라, 악의 제국의 하수인이 쓰는 무기는 경찰의 표준 제식 권총과 삼단봉이고, 경찰 복장에서 장식만 단 복장을 입고 있다고 묘사하면 되겠죠? 결말은 정의의 히어로(연쇄살인마)가 악의 제국(경찰)을 물리치고 소녀들(살인피해자)과 행복하게 집안에 사는 걸로.
왜요? 지금 ‘칸코레’가 딱 그 모양 아닙니까? 딱 위의 문장 단어 좀 바꿔주면 각 나오는데. 아닙니까? 제독(대일본제국의 해군 제독)이 심해서함(연합군)을 물리치고 칸무스(대일본제국의 함대)와 행복하게 사는 게 지금 이 게임의 내용 아닙니까. 연쇄살인마가 자신의 소설 속에서 피해자들과 살인을 소재로 깔깔거리는 모습. 정말 ‘문제 없는 모습’이군요. 많이 팔아먹으시길.
아 뭐, 국가랑 인간을 일 대 일로 비유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반발하는 분들이 슬슬 나오실 법 합니다. 그래요. 맞습니다. 사실 일 대 일로 딱 맞춰서 비교하기에는 힘들죠. 위의 ‘연쇄살인마’ 사례에서는 연쇄살인마가 자신의 잘못을 뚜렷이 알고 이를 적극적으로 미화하려 했다는 전제가 깔려있지만, 이 ‘칸코레’ 사례에서는 비단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좀더 쉽게 말하자면, ‘칸코레’ 자체에 –현재로써는- 일본제국의 침략 전쟁과 전쟁 범죄 행위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기 위한 의도나, 그 의도에 기반한 행동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까 위에서 실컷 미화니 뭐니 비판해놓고 이제 와서 딴 소리냐고요? 아니죠. ‘미화’는 분명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건 우익적인 의도에서 비롯된게 아니라,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순전히 소비자(일본인)들에게 팔아먹기 위해서 껄끄러운 부분을 묘사하지 않고 넘어가는, 즉 상업적인 의도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우익의 행보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훨씬 더 주목해야만 하는 사례지요.
‘칸코레’가 정치적 의도를 배경에 깔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일본 극우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와는 다른 양상의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와 그 역사라는 정치적 사안을, 탈정치화라는 이름으로 세탁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전쟁범죄는 더 이상 정치적으로 타국에 사과해야 할 문제가 아닌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소재가 되고, 역사는 반성과 고찰의 대상이 아닌 웃음과 재미의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탈정치화되서 맥락에서 이탈한 역사와 사건들은 논쟁의 대상 조차 되지 못하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왜곡되고 망각됩니다.
최소한 우익의 프로파간다는 ‘정치적 사안’으로써 ‘정치적 논쟁’을 불러오기라도 합니다. 그러나 ‘탈정치화’된 사안은 어떠한 정치적 반향도 불러오지 못합니다. ‘왜 그런걸 가지고 싸우나?’라는 무관심한 반응만을 불러올 뿐이죠. 문제는, 그러한 ‘탈정치화’로 정착되는 ‘사실’과 그에 대한 ‘해석’들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쟁범죄의 망각, 태평양 전쟁의 즐길거리화, 승자가 뒤바뀐 역사, 침략 함대의 미화, 전쟁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 의식의 상실. 이 모두가 그냥 넘어갈 사안은 아님이 분명하고, ‘탈정치화’라는 세탁 과정을 거쳐서 정착하게 놔둘 만한 문제가 아님 역시 명백합니다.
이러한 ‘탈정치화’의 결과이자 전달자인 ‘칸코레’의 성공과 그로 인한 여파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들을 도출해낼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들은 ‘탈정치화’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이유임과 동시에 이러한 ‘탈정치화’를 늦추려 하며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하는 주변국과 그 국민에게 장애물로써 작용할 것입니다.
첫 번째로, 소비자, 즉 일본인의 일반 정서 자체가 이미 심각할 정도로 관련 사실에 무지하고 무감각하거나 혹은 고의적으로 무시하기로 작정을 했다는 것. 분명 일본이 제대로 무장을 할 수 없게 된 계기가 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전쟁을 한낱 웃음과 성적 요소를 팔아먹기 위한 소재로 쓴 것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칸코레’를 소비하는 젊은 층들 사이에서 심각할 정도로 태평양 전쟁에 대한 무지, 혹은 무감각이 확산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칸코레’에 대한 일본 내의 몇 안 되는 정치적 비판이 극우 계층에서 비롯되며, 그 골자가 ‘일본 함대의 강력함과 전공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인 것은 일견 보면 아이러니하게 보이지만, 이러한 ‘정치’/’탈정치’의 맥락을 본다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닙니다. 극우들의 이상향은 모두 ‘정치적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일본제국의 구현이고, 칸코레의 탈정치화, 무감각화에서 비롯되는 미화는 우익에겐 그렇게 구미에 맞는 내용이 아니니까요.
두 번째로, 칸코레의 인기가 확산되고, 일본 내에서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미화된 태평양 전쟁의 모습은 역사적 지식에 대한 무지를 기반으로 매체 수용자들 사이에서 확고하고 빠르게, 그리고 폭 넓게 자리잡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역사의 망각을 불러올 것입니다. ‘물론 몇몇 분은 이 대목에서 말도 안되는 과장이다. 칸코레 한다고 우익이 된다고?’라고 묻겠죠. 물론 그네들이 원하는 대답은 ‘아니오’겠지만 전 거기에 대고 정면으로 ‘네’라고 대답해드리고자 합니다.
단순한 도식입니다. 아름답고 귀여운 소녀들로 구성된 ‘대일본제국 연합함대’와 기괴한 모습으로 구성된 ‘파운드 야드법을 사용하는 침략자 군대’. 어느 쪽이 더 호감이 갑니까? 아 물론, ‘심해서함’중 일부 등장 함에 대한 컬트적인 인기와 애호가 존재한다는 건 저도 잘 압니다. 근데 그러한 애호는 결국 가학성/피학성이 동반된 성적 애호 및 소유욕으로 연결되지 않습니까? 그거까지 호감으로 따질 거면 일본 특촬물에 나오는 여간부에 대한 컬트적인 인기를 악역 집단의 인기로 치환해서 봐야 할 겁니다. 예,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그러니 이러한 ‘심해서함 애호’는 한 켠으로 치워놔도 될 것입니다.
여하간, 이제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지 눈치채셨을 겁니다. 이러한 의식적/무의식적인 호감의 형성이 무지와 결합하는 순간, 사람을 손 쉽게 특정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지요. 여기서는 ‘모티브로 삼은 태평양 전쟁’에서의 ‘연합함대’와 ‘대일본제국’에 대한 호감으로의 인도가 되겠군요. 좀더 상식적인 비유로 가볼까요? 외모 묘사와 성적인 어필이 호감을 끌지 못한다면, CF 등 대중 선전을 목적으로 한 매체에서 외모나 성적 매력을 중시한 모델 기용이 이루어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겠지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칸코레에서 묘사되는 ‘아이언 바텀 사운드’와 ‘미도우에’ 해전 등 다양한 묘사를 통해 태평양 전쟁은 윤색되고 재해석/왜곡되며, 이는 태평양 전쟁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그릇된 선입견을 심어줄 정도로 충분히 위력적입니다. 일본 내에서 그릇된 역사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칸코레’는 그러한 추세의 결과물임과 동시에, 그 경향을 더욱 크게 증폭시키고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만한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굳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칸코레가 인기를 잃고 추락할 수도 있고, ‘칸무스’들에 대한 호감이 ‘대일본제국 연합함대’까지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 만큼은 말씀드리고 싶군요. 칸코레를 즐기고 계신 분들, 특히 이 매체를 통해서 태평양 전쟁의 해전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아카기’, ‘카가’, ‘시마카제’… 이러한 이름을 들었을 때 일본제국의 해군 함선이 먼저 떠오릅니까, 아니면 ‘착하고 아름다운’ ‘칸무스’들의 모습이 먼저 떠오릅니까?
자, 여러분의 대답은 어떠십니까? 제가 보기엔 최소한 왜곡된 이미지로 기존 역사를 ‘덮어씌워’망각을 유도하는 작용은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세 번째로, 이러한 작용이 일본을 벗어나서 세계인들 사이에 파급력을 지니고 파고들 것입니다. 서양인들 사이에서 와패니즘이 폭넓게 퍼져있는 것은 이미 새삼스러운 이슈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게임만큼 ‘태평양 전쟁’을 미화하고 세탁한 매체 중 크게 성공하고 주목 받는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 많은 서양인들이 일본 내에 서비스를 한정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도 칸코레를 즐기며 ‘칸무스’들에 대한 애호를 표현하고 있지요. 물론 이들이 태평양 전쟁과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건 당연할 것입니다. 무지와 미화의 조합을 통한 인도는 안 그래도 눈에 찌푸려질 정도로 퍼진 와패니즘을 가속화할 것이며,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우경화 행보에 호감을 갖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늘리게 되겠지요. 하다 못해, 월드 오브 워쉽에서 ‘왜 욱일승천기를 쓰면 안되는 거지? 그건 멋지다고!’라고 외치는 자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마당에 말입니다.
몇몇 칸코레 (국내) 커뮤니티에서는 칸코레를 즐기고 있는 미국 군인의 모습을 보고 ‘승자의 여유’, ‘천조국의 기상’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지만, 과연 그게 우스갯소리로 치부될 일 일까요? 제가 보기에 그건 역사의 망각이라고 보입니다만.
<저 미국인 네티즌은, 윌리엄 홀시 제독의 분노에 찬 발언과, 진주만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물론 국내의 ‘일본문화 애호자’들의 이야기도 빼놓아선 안될 것입니다. 아, 제가 그렇다고 칸코레를 하는 국내 유저를 ‘칸코레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흔히 말하는 ‘프로매국노’로 몰려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우리나라는 일본과는 환경의 차이가 꽤나 있는 편이니 단순 비교하기엔 상당히 무리가 있습니다. 우선, 우리나라의 경우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와 그들의 잔학상이 잘 알려져 있으며,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어떻게 ‘꼴사납고 처절하게’ 미국에게 몰락했는지에 대한 이야기 역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 중 많은 분들이 ‘치하’의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임팔 작전 중 일어난 죽음의 행군 이라던지요.
실제로 한국 내에서 칸코레를 즐기는 유저들 사이에서는, ‘미도우에 해전’과 같은 칸코레의 태평양 전쟁을 모티브로 하는 컨텐츠 계획에 대해 ‘상대가 미국이고 배경이 미드웨이인데 얼마나 어렵게 나올까?’ ‘천조국의 기상’ ‘엔터프라이즈 만세’와 같은 이야기가 주로 나옵니다. 위에서 언급한 ‘무지와 결합한 미화’에서 무지가 빠지는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에 대한 예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보시다시피 칸코레를 즐기는 유저 사이에서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논의가 되고 있는 모습 역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출처 : 디시인사이드 타르타로스 갤러리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tartaros&no=280290&page=1&search_pos=-283847&s_type=search_name&s_keyword=%EB%A7%88%EA%B3%B5%EC%8A%A4%EC%8B%9C )
그러나 국내의 ‘칸코레’ 유저들이 이렇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이런 모습만 보여줬다면 제가 굳이 언급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출처 : 디시인사이드 타르타로스 갤러리, 위의 글 작성자와 동일인물이 직접 제작한 ‘지지캐’ 짤방>
국내의 ‘칸코레’ 유저들은 일본제국의 침략이라는 것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웃음거리나 성적인 매력으로 삼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를 인식하는데 인식하고 끝, 아니 인식하고 그냥 저기 한 구석으로 치워둔다는 겁니다. ‘문제가 있긴 한데, 나랑은 별 상관없어.’이게 국내에서 ‘칸코레’를 즐기는 유저들 대다수의 심리입니다. 아, 대다수라고 하기엔 좀 그렇군요. 저들 중 태반은 역사에 관심이 없어서 문제가 있는 지도 모르는 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게 왜 문제인데? 깔깔깔’이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두 후자는 굳이 언급할 가치 조차 없으므로, 일단은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치워두는’ 행태를 먼저 꼬집어봅시다.
문제를 인식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이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가 내 개인적인 즐거움보단 우선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해당 매체를 수용하고 소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들의 모습이죠. 간단하게 비유해서, ‘남양유업이 밀어내기를 하든 대리점 점주에게 쌍욕을 하고 소상공인을 박해하든 말든 저지방 우유는 남양우유가 최고니까 남양우유 먹을 거다!’라고 말하는 자들이나, ‘상자나 키트템과 같은 도박템이 게임계를 망치긴 하는데 난 내 돈 쓸꺼다! 대박 하악하악’이라고 하는 자들과 같은 부류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죠. ‘내가 내돈 쓰겠다는데(내 맘대로 게임하겠다는데) 니들이 뭔 상관?’ 이러한 비윤리적 소비의 문제를 지적하자면 아예 그 주제로 글을 따로 써야 할 테니, 여기에선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아, 예. 물론 니 자유시겠죠. 그 자유의 결과로 시장과 사회에서 부도덕은 더 판을 칠꺼고.”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미 문제를 인식한 상태에서 자신의 편익을 위해 문제에 대한 더 이상의 인식을 사실상 거부하고 있지요. 이들은 문제가 있음을 알고도 ‘카가 집안에 살고 싶다’라는 농담을 하며 웃음과 성적 매력을 소비하고 있고, 그 결과 문제-그러니까 여기서는 태평양 전쟁의 맥락 왜곡과 일본제국의 함대, 그리고 그 함대를 이루는 함선의 미화-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맙니다. ‘미화 좀 되면 어때? 귀엽고 예쁘고 좋기만 하구만.’이라고 말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의 확산은, 정말 태평양 전쟁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이 매체를 받아들이기 쉽게 촉진하고, 문제의식이 자리잡지 않은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친일’로 왜곡할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의적으로 친일이란 용어를 썼습니다. 저는 지금 일본 AV를 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하반신 친일이라는 농담조로 이 용어를 던진 것이 아닙니다. 태평양 전쟁과 일본의 전쟁범죄, 그리고 역사의 맥락 전체를 왜곡하는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의 인식을 거부하고, 무감각해진 사람들이 ‘미화 좀 되면 어때’라고 말하고, 미화가 무감각하게 퍼져나갈수록 그 이미지에 투영되고 세탁된 잘못된 맥락을 손쉽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 당연하고도 심각한 우려를 말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스스로의 행동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는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 일본이 잘못한 건 아는데, 칸무스 이쁘고 귀여워요.’ 과연 그걸로 끝일까요? ‘칸무스가 귀여우니 태평양 전쟁이고 뭐고 내 알바 아니다’, ‘과거가 어쨌건 칸무스가 이쁜걸!’이라고 말하는 고의적 망각의 단계에 접어들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더불어 ‘그게 왜 문제인데요? 문제 아닌데? 깔깔깔’이라고 말하는 집단 광기성 사회적 의식 부재자들의 향연이 더해지면 참 볼만한 꼴이 연출되겠지요. 아, 제가 너무 용어를 복잡하게 썼나요? 네이버 등 각종 포탈에 서식하는 ‘허세 환자’들이나 ‘일베충’같은 자들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칸코레가 국내에서 인기를 끌면 끌수록, 이러한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며, 이는 현재 일관되게 추진되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 문제와 어우러져 하등 좋지 않은 모양새를 연출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일본 내에서의 태평양 전쟁과 그들의 잘못에 대한 망각은 가속도를 붙이며, 일본의 우경화에 큰 힘을 실어주겠지요.
결 언
인간의 어리석음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까놓고 말해 ‘칸코레’는 한 때 한국 사회에서 크나큰 논란이 되었던 ‘위안부 누드’와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위안부 누드’ 역시 ‘칸코레’처럼 우익적인 의도를 고의로 담고 있었던 것이 아닌, 단순한 ‘상업적(혹은 그들의 주장대로 예술적) 의도’에서 출발했으며, 일본 위안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누드 모델의 아름다운 성적 매력과 그 이미지로 ‘덮어씌움’으로써 위안부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고 ‘곡해’시킬 우려가 있었습니다. 극소수의 ‘위안부 누드’ 옹호자들은 ‘의도가 그러한 것이 아니며, 단순한 예술적 시도다’라고 옹호하였으며, 이들은 이러한 시도가 문제, 즉 논란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옹호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또 이 위안부 누드가 문제 없이 세상에 나왔더라면, 위안부에 대해 모르는 미성년자들이 이러한 이미지들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그릇된 인식을 갖을 위험이 더욱 커졌겠지요. 아 더불어, 위안부에 대해 잘 모르는 세계인들에게도 말입니다.
‘칸코레’가 불러오는 역사의 탈정치화는, 유감스럽게도 현재 아베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 및 확장주의 움직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들, 그리고 그들을 추종하고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일본 국민들에게 과거의 역사란 이미 처리가 끝난, 즉, 더 이상 ‘정치성을 띄지 못하는’ 이슈이며 그들의 ‘정치적 이슈’란 센카쿠 열도 분쟁, 한국의 독도 ‘강제 침탈’등 오로지 일본에게 가해지는 주변국의 ‘부당한 횡포’일 뿐입니다. 그들은 과거를 잊고 있습니다. 과거를 잊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과거를 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칸코레’는 그 흐름 속에서 나타난 상품이며, 그 흐름의 속도를 빠르게 하는 촉매입니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한국에서도 그 흐름에 휩쓸리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고요.
자신들의 과거와 그 잘못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으며, 알아도 그것을 다시 생각하지 않는 자들이 늘어가면 늘어갈수록, ‘역사의 교훈’은 빠르게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자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법이죠. 그게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상관 없이 말입니다.
P.S. 2014년 6월 5일 오전 7시 9분 부로 '너닮아서'님의 지적 내용에 의거해 상단 격언 인용 문구 중 하나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를 '역사를 잊은 국가에게 미래는 없다'로 수정하고 격언 발언자를 신채호에서 윈스턴 처칠로 수정하였습니다.
P.S 2. 2015년 1월 1일 오후 11시 3분 부로 'M4'님의 지적에 따라 기존 미군 해병대원이라 착오했던 연장포탑 코스플레이어의 사진을 지우고 그에 걸맞는 예시로 교체하였습니다.